"이제는 사람들이 갈급하지 않아서 교회(모임)를 찾지 않는다."
어느 정도는 사실이다.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성도들, 상당수의 사람들은 이전 세대의 배고픔과 치열함으로 살지 않는다. 그러나 갈급하고 간절하지 않다는 말은 거짓이다. 사람들은 여전히 갈급하고 영적-정서적 갈증에 시달리고 있다. 문제는 이 시대의 갈증을 교회가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다.
지금의 젊은이들이 느끼는 갈증은 20-30년 전과 동일할 수가 없다. 사회현상도, 가치기준도, 심지어는 자산의 기반도 상당히 다르다. 7080의 사회적 배경에는 논밭을 정리하거나 소를 팔아서 상경한 뒤에 자수성가를 하는 신화가 있다. 한편으로는 한 직장에서 근속하며 건강하고 아름답게 정년을 맞이하는 판타지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의 20-30대에게는 상당한 거리감이 있는, 부합되지 않는 현실이다. 지금의 출발점은 내집마련의 꿈, 자수성가의 꿈, 건강한 정년퇴임 같은 갈망과 거리감이 있다. 전혀 다른 가치에 '투자'를 하여 수익과 행복을 찾아가는 시대를 살아간다. 어느 세대에게나 판타지가 있다는 점은 동일하지만 그들의 갈증을 똑같이 상대할 수는 없다.
수십 년 전과 같은 형식의 메시지, 수십 년을 지속한 교육방식,
수십 년을 반복한 프로그램들은 '효과적'일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본질적'이라고 말하면서 변화하지 못하는 책임을 회피한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와 같은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1세기의 유대인들은 안정적이고 검증된 신앙교육의 방법을 갖고 있었다. 그들의 메시지와 형식은 토라의 본질을 추구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질적'이고 상대방은 '영적 갈증을 잃어버린' 것이었다.
성전과 회당에 누수가 발생했다면,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관념에서 그것은 '백성의 책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세례 요한을 찾아가서 "한번의 세례를 받으면 영적 갱신이 이루어진다"고 믿는 사람들을 향해 '발작적인 신앙'이라고 폄하했을 수도 있다. 회당에서 영적 공급을 받지 않는 것 자체가 문제며, 바닷과와 들에서 예수를 만나는 '사람들'이 문제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사람들의 영적 갈증을 정확하게 알고 계셨고 충분히 공급해 주실 수 있었다. 변한 것은 사람들이 아니라 회당과 성전의 유대인들이라고 반박하셨다.
오늘날의 교회에 주님이 찾아오신다면...
그분은 병자를 고치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실까?
반드시 그렇지는 않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히 그분은 거라사의 돼지떼를 몰살시켰다. 한 도시의 경제를 붕괴시킬 정도의 큰 충격을 일으키셨다. 우리 시대의 교회는 그러한 충격을 기쁘게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을까?...
사람들은 여전히 갈급하다.
다만 우리가 시대의 갈증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떻게 그 갈증을 풀어가야 할 지 모를 뿐이다. 제자들이 무리들의 허기에 대하여 당황하고 있을 때 안드레는 무의미해 보이는 질문을 던졌다. 그런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같은 '공급'의 단추를 고민하는 것, 주님은 그것을 기다리고 계실지도 모르겠다.
#생각 #영성 #영적갈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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