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세례 현장에서부터 시작된 메시지, 회개를 세례에 동참하면서 예수께서는 하늘로부터 음성을 듣습니다.
함께 한 사람들은 그 놀라운 메시지를 듣게 됩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며, 내 기뻐하는 자라!"
그러나 그 복된 메시지는 온데 간데 사라지고 난데 없이 시험과 난관이 찾아옵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이 상황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일을 겪는 사람, 예수님에게는 자연스런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누군가가 예수님처럼 시험을 당한다 생각해 보십시오. 당사자에게는 정말 힘들고 곤혹스러운 일입니다.
우리는 종종 갑작스럽게 위기를 만나게 됩니다.
강력한 은혜와 영적 체험이 있다면 그 뒤에 더욱 강력한 위기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왜 우리는 이런 일들을 경험하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왜 은혜와 영광 뒤에 우리를 더욱 강력하게 보호해주시지 않으실까요?
위험을 당하며 우리는 대개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합니다. 우리가 겪는 위험과 시험은 하나님의 권한 아래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이 위안이 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도리어 우리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이란 멀리에 있는 것만 같다는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일하시는 방식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상황을 이끌어가시는 데는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마가복음 1장은 세례 요한이 베풀고 있는 세례의 현장, 요단강으로 우리를 이끌어갑니다.
짧지만 세례 요한의 사역이 한창이었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분은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요단강까지 왔다고 기록합니다. 사실은 모두 그리 멀지 않은 지역들입니다.
일반적으로 세례를 베풀던 장소를 베다니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1장 28절에는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두 곳의 베다니가 등장하고, 세례 요한이 활동하던 그 베다니는 예루살렘의 가까운 곳에 있던 익숙한 동네가 아닙니다.
These things took place in Bethany abeyond the Jordan, where John was baptizing. New American Standard Bible: 1995 update. (1995). (Jn 1:28).
베다니는 무화과나무의 집이라는 의미를 가진 말이라고 합니다.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참 일상적이고, 또 베다니는 예수님의
사역에서도 가장 빈번한 무대가 되었던 곳입니다. ('Bethania', Gk. form of Beth-ananiah, i.e. O.T. Ananiah.
Bethany "house, place of unripe figs" is a village located on the E slope of Mt. Olivet, about one and one-half miles from Jerusalem.” - http://www.bible-history.com/geography/ancient-israel/bethany.html)
지금은 이곳을 나사렛이라고도 부른다고 합니다. 베다니라는 지명이 지금도 명확하지 않은 부분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어떻게 부르거나 그 의미와 정서가 중요할 것입니다. 그만큼 성경을 읽는 사람에게 친숙하고 가까운 곳입니다. 그렇게 보면 9절에서 예수님께서 나사렛에서 왔다는 것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가까이 계셨다는 의미로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지리적인 거리도 가까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의미를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가까이에서 세례 요한의 발걸음을 지켜보시면서 천천히 다가오셨습니다. 금방 찾아갈 수 있는 거리에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분은 당신의 때를 충분히 기다리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겪게 되는 위험과 시험과 대비되는 영광에 대해서 더욱 깊이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우선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는 장면은 찬란하고 빛나는 영광 가운데 있습니다. 그 영광은 특별한 상징들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머리와 가슴을 자극합니다. 성경에는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오심을 보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늘이 갈라진다는 말은 하늘이 열린 것을 표현한 아주 특별한 말입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도 하늘이 열렸다고 똑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비둘기 같이 내려오신다는 표현은 다른 어떤 곳에서도 찾기 어려운 표현방식이라고 합니다. 사실 비둘기 같이 임하신다는 것, 그 느낌을 우리는 어렴풋이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64:1) “원하건대 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 주 앞에서 산들이 진동하기를”
또 우리는 성령 하나님께서 아름답고 눈부시게 임하시는 모습을 상상할 수도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는 하늘이 두 번 나옵니다.
하늘이 열렸고, 그리고 하늘로부터 소리가 났습니다. 하늘 역시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물리적으로 하늘이 갈라지는 기현상을 보았을까요? 우리는 알 수 없겠죠. 하지만 마가는 하늘이라는 상징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 여호와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을 표현합니다. 예수님의 사역 뒤에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임재를 마가는 명확하게 바라봅니다. 그는 하늘로부터 소리가 났다고 기록합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이 문장의 오늘 짧고 강력한 영광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 문장은 아주 중요한 두 가지 메시지를 제공합니다.
먼저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말은, 아가페토스(ἀγαπητός) 곧 사랑과 애정을 표현하는 수식어이면서 동시에 ‘유일하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독생자, 외아들 예수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라는 하늘의 소리는 예수님의 메시야 되신 것을 알려줍니다. 다음으로 내가 너를 기뻐한다는 하늘의 소리가 있습니다. 이 문장도 역시 이사야 42장 1절의 말씀을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의 성취와 함께 이 문장은 기쁨의 선택을 품고 있습니다. 유대의 전승에서는 이렇게 기뻐하는 선택을 주인과 종의 관계에서 이해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하나님의 종 예수를 세상에 선포하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복음의 핵심을 담은 두 문장을 우리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메시지로 듣게 된 것입니다. 정말 엄청난 메시지였고, 강력한 전달 방식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삶 속에서 이만큼의 강력한 영적체험이 몇 차례나 있었습니까?
우리는 변화산의 사건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늘로부터 소리가 난 경우, 하나님의 음성은 그밖의 사건들 속에서는 찾기가 어렵습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은 모두 똑같이 이 메시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이 일은 매우 인상적이고 중요했습니다.
하지만 세례를 받는 순간은 짧은 시간이었습니다. 영광스러운 광경도 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시험은 40일 동안이나 계속됩니다. 사탄과 들짐들이 함께 있었다고 적습니다.
예수님은 심한 위기를 만나게 됩니다. 그분은 강력한 외적 작용에 의해서 떠밀려 가셨습니다.
12 Και ευθυς το Πνευμα αυτον εκβαλλει εις την ερημον
Immediately the Spirit impelled Him to go out into the wilderness.
큰 영광 뒤에 성령께서는 즉각적이고 갑작스럽게 예수를 떠밀어 가셨습니다. 그래서 개역개정 성경에서는 ‘곧’이라는 말로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영어성경에서는 “και” 라는 단어를 “갑자기, 그 때에, 급작스럽게” 등의 의미로 해석을 했습니다. 원래는 “그리고, 그래서”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만큼 갑작스럽게 상황이 달라집니다. 금식과 시험이 다 지나간 후에 예수께서는 위로와 쉼을 얻습니다. 하지만 위로도 잠깐입니다. 13절의 기록을 마태복음 4장 11절에서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우리는 일의 순서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또 다시 장면을 전환합니다.
어떤 일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수종드는 천사들도 역시 잠깐이라는 것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마가는 곧이어 요한이 잡혔다는 사실을 기록합니다. 예수님의 영광 뒤에 요한의 세례는 중단되었고 백성들은 다시 불안감에 사로잡혔을 것입니다. 구원과 회복은 다가오는 듯 했지만 도리어 앞이 캄캄해집니다. 광야로 가시고 시험을 받으시는 예수님, 백성들은 그가 사라졌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까지 붙잡히면서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이 다시 가리워졌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정말 드라마틱한 전환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아들을 이끌어가는 방식, 또한 우리를 인도하시는 삶의 방식입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성도의 삶 속에서 영광은 짧습니다. 도리어 긴 위험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과의 만남이 있었습니까?
예수님과의 행복한 추억, 성령의 뜨거운 만남, 우리는 그런 빛나는 영광 뒤에 우리는 어떠한 삶을 살고 있습니까?
도리어 하나님은 침묵하시고 예수는 우리의 삶에서 잠적하신 것처럼 느껴지지는 않습니까?
이런 일들이 이미 오래 전이고 지금은 그것이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첫사랑이 되고 있습니다. 도리어 그보다 훨씬 많은 어려움과 신앙의 고민들이 우리 주변에 놓여 있습니다. 어쩌면 예수를 믿은 뒤에 도리어 더 많은 위험과 시험이 더 많아진 것은 아닙니까?
감격과 영적 성장, 간절한 그 무엇을 위해 노력을 해도 쉬 찾아오지 않는 은혜이기 때문에 어쩌면 은혜를 누리는 것조차 포기한 심정일 수도 있습니다. 이미 감격적인 신앙생활은 내려 놓고 그저 잔잔하게 흘러가는 신앙생활이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그저 반복되는 예배를 드리며 신앙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 지금 우리의 단면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지금 괜찮다고 말할 수 없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실망하거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너무나 영광을 짧기 때문에, 너무나 시험을 길기 때문에 우리는 절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시험을 당하실 때 하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임재하지 않으셨습니다. 수종들던 천사도 광야에는 없었습니다. 그렇게 시험을 견뎌내고 돌아온 갈릴리 땅에서는 요한이 붙잡혔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예수님이 겪은 긴 시험은 바로 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오직 말씀으로 이 시험을 이겨내십니다.
짧은 영광 뒤에 긴 위험과 시험이 있는 것은 성도에게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긴 위험과 시험은 우리가 예수와 같은 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긴 위험 속에서도 믿음으로 살아가며 우리는 더욱 예수님을 뒤따라갑니다. 오직 우리는 말씀으로 이 시험을 이겨낼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이 길의 끝에 서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는 이 길을 함께 걷고 계십니다.
눈에는 들짐승들이 함께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보이는 것에 속지 마십시오. 우리는 위기의 시간들 속에서 하나님을 매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 경험은 우리의 피부에 와닿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은 응답과 감동보다는 인내와 믿음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오직 말씀과 기도만이 우리의 인내와 믿음을 도와줄 것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예수님께서도 강력한 영적 체험과 감격보다 일상적인 기도의 자리를 더 많이 경험하셨습니다.
우리는 오늘도 오랜 위험과 고난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오늘도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서 일하십니다.
Araun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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